개요

조미료를 고르기도 전에 요리가 맛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처음 기획할 때 광질 게임을 요리로, AI를 조미료로 두었다. 요리가 맛없으면 무엇을 쳐도 소용없다고. 그런데 둘이 맛본 첫 요리에는 재미, 도파민 요소가 아예 없었다..

광질 게임인데 광질이 맛없으면 광질을 버려야 할까? 우리는 광질을 재료로 남기고 재미를 다른 데로 옮겼고, 그러다 광부가 하늘에서 구름 캐는 천사가 됐다. 그 과정을 적어보겠다!

“재미없다”를 빈칸으로 바꾸기

테스트 판에는 때리면 도망가는 광물, 캐다 보면 터지는 광물, 팀 점수가 다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도 남은 건 “재미없다” 하나였고, 이것만으로는 무엇을 고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친구끼리 하는 협동 게임 중 잘된 것들(R.E.P.O, 리썰 컴퍼니, 마인크래프트 다이아 서버, PEAK)에서 반복되는 원리를 뽑고, 우리 테스트를 같은 표에 넣었다.

원리 성공작에서 2인 테스트
P1. 동사가 공동 문제를 만든다 무거운 물건 같이 들기, 동료 끌어올리기 비어 있음
P2. 실수에 눈에 보이는 비용이 있다 부딪히면 깎이는 물건 값, 차감되는 다이아, 줄어드는 스태미나 있음 (터지는 광물, 팀킬)
P3. 공개된 숫자 하나에 압력이 걸린다 할당량, 목표 다이아 개수 비어 있음
P4. 흩어지면 손해다 혼자 못 드는 물건, PEAK에서 혼자 앞서가면 쫓아오는 Scoutmaster 비어 있음
P5. 통제 밖의 교란이 있다 몬스터, 방송 시청자 있음 (도망가는 광물)

P1·P3·P4가 비어 있다. 각자 자기 바위를 때리는 구조는 같은 맵에 있을 뿐, 싱글플레이 두 판을 나란히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류의 재미는 보통 3~4명이 음성 채팅을 하면서 나온다. 그래서 2인 테스트의 “재미없음” 중 일부는 인원과 통신 조건 탓일 수도 있다. 그래도 비어 있는 세 칸은 사람을 늘린다고 채워지는 칸이 아니었다.

채굴은 재미가 아니라 입력이었다

표를 보다가 이상한 점이 하나 보였다. 성공작에서도 캐는 행위 자체는 재미의 원천이 아니다.

  • 다이아 서버의 채굴은 깎일 수 있는 저축이다. 모아 둔 다이아가 기준선이 되어야 후원으로 깎일 때 아깝다.
  • Deep Rock Galactic의 채굴은 팀이 지나갈 길을 만든다. 캐는 게 곧 이동 경로다.

요리로 치면 채굴은 맛이 아니라 재료였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광질을 버릴까?”가 아니라 “캐는 걸 무엇의 입력으로 쓸까?”. 광질을 남기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덤으로 이미 만든 타격·검증 코드도 캘 대상만 바꿔 그대로 쓸 수 있다.

광물 대신 구름을 캐는 천사

새 컨셉을 찾으려고 AI에게 아이디어 발산을 요청하면서, 예시로 “천사가 되어 광물 대신 구름을 캔다”를 적었다. 그 예시가 그대로 컨셉이 됐다.

하급 천사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캐서 지상 주문대로 떨어뜨린다. 내가 캐는 구름이 동료의 발판이고, 섞은 구름이 지상의 날씨가 된다.

팀원이 그린 그래픽 초안. 후광을 단 네모 머리 천사가 청소기로 구름섬을 빨아들이고, 동료는 구름 덩어리를 나르고, 한 명은 떨어지고 있다. 아래쪽에는 캐릭터, 청소기, 구름 3종, 흙섬·탑·다리·주문대 시트가 있다

한 판은 출근(주문서) → 채굴 → 운반·섞기 → 투하 → 정산(고객 리뷰) 순서로 돈다. 구름은 적운(흰색), 비구름(파란색), 뇌운(보라색) 세 가지로 시작한다.

G.Ore 고래와 손 없는 6족 로봇, 등 해치 가방까지 쌓아 둔 세계관은 이번에 폐기했다. 이름 Minor On Air는 남겼다. 원래는 비주류(Minor) 광부(Miner)의 방송(On Air)이었는데, On Air를 글자 그대로 “공중에서”로 읽으면 공중의 광부가 된다. 이름은 오히려 새 컨셉에 더 맞는다.

팀원이 그린 또 다른 초안. 왼쪽 위에 날개 달린 Minor On Air 로고와 "구름을 캐서, 세상에 날씨를!" 문구가 있고, 아래에 밀기·떨어뜨리기, 붙잡기·구조하기, 물건 운반(협동), 청소기 상호작용(병맛) 네 장면이 있다

규칙을 다 빼도 남는 감정

컨셉의 기능마다 “규칙을 다 빼도 남는 감정이 뭐지?”를 물어 줄였다.

기능 남는 감정
발판 캐기 내 이득이 남의 위험이 된다 (젠가의 마지막 블록)
추락 슬랩스틱. 벌칙이 가벼워야 웃음으로 끝난다
투하 손을 떠난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굴러가는 볼링공)
리뷰 방금 낸 사고를 피해자 입장에서 한 번 더 본다
섞기 발견, 그리고 동료에게 “이거 돼!”라고 알려 주는 순간

핵심은 앞의 셋이 이어지는 흐름이다. 욕심내서 캐고 → 떨어뜨리고 → 결과가 남의 입으로 돌아온다. 웨딩 촬영장에 우박을 떨어뜨리면 정산 화면에 “웨딩 촬영 중에 우박이요… ★1” 같은 리뷰가 뜨는 식이다. 추락과 섞기는 이 셋이 살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R.E.P.O와 리썰 컴퍼니는 물건을 옮기면 끝이고, 정산은 숫자다. 투하와 정산이 각각 따로 웃길 수 있다는 게 이 컨셉이 다른 점이다.

그래서 다음 1주 프로토타입은 질문 두 개만 본다. 발판을 캐는 게 웃긴가? 섞어서 떨어뜨리고 리뷰를 보는 게 웃긴가?

레퍼런스는 원리 하나만

이 과정에서 하나 데었다. 협동 공포 보드게임 Invokyr(인보키어)를 참고해서 특징만 분석해 보라고 했는데, AI가 급발진해서 내 기획안 자체를 바꿔 왔다. 보드판, 주사위 6종, 진행자, 저주 누적, 퇴근 의식까지 장치 다섯 개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었고, 컨셉은 구름 캐는 천사가 아니라 인보키어 쪽으로 끌려가 있었다..

장치를 통째로 가져오면 뭐가 재미를 만든 건지 알 수도 없다. 변인이 다섯 개라서. 그래서 규칙을 정했다.

  • 레퍼런스는 짧게 분석하고, 재미의 뿌리 원리 하나만 뽑는다.
  • 한 번에 하나씩 얹고, 얹을 때마다 확인할 질문을 하나 붙인다.

인보키어를 이렇게 다시 보면 원리는 “앞으로 가려면 위험을 직접 불러야 한다” 하나다. 우리 컨셉에 얹으면 “납품할 때마다 하늘에 사건이 하나 생긴다” 한 줄로 줄어든다.

역할은 나누지 않고 섞는다

협동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할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역할에도 두 종류가 있다.

  배제형 조합형
규칙 그 역할만 할 수 있다 섞으면 새 결과가 나온다
예 원신의 원소 퍼즐, 특정 클래스만 여는 문 원신의 원소 반응, 야생의 숨결의 화학 엔진
협동 강제된다 이득이 된다
해법 하나로 고정 여러 개 열림

“이게 되네?”는 규칙이 모든 대상에 똑같이 적용되고 한 문제에 해법이 여러 개 열려 있을 때 나온다. 그래서 “구름끼리 닿으면 섞인다”를 특정 역할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구름에 똑같이 적용되는 세계 규칙으로 두는 방향으로 잡았다. 비구름과 뇌운이 닿으면 천둥 소나기가 되는 식이다.

봄바나나처럼 플레이어마다 볼 수 있는 정보와 할 수 있는 행동을 고정하는 방식도 봤는데, 이건 재미를 더하는 게 아니라 바꾸는 쪽이다. 넣는 순간 게임의 중심이 정보 전달 퍼즐로 옮겨 간다.

캘 수 없는 땅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초안에는 흙섬, 집, 탑, 다리가 다 있다. 회의에서 이걸 하나씩 정리했다.

  • 흙섬은 남기되 캘 수 없는 고정 지점(앵커)으로만 쓴다. 스폰 포인트나 특정 이벤트 자리다.
  • 나무는 장식, 집은 뺀다. 건축물은 기능이 확정될 때만 넣는다.

모든 땅을 캘 수 있으면 누가 스폰 포인트까지 캐 버릴 수 있다. 리썰 컴퍼니의 우주선처럼, 부서지는 세계에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 기준점이 하나는 있어야 돌아갈 곳이 생긴다.

날개는 그림에만 있다

초안의 천사들은 전부 날개를 달고 있다. 그런데 MVP에서는 날개를 뺐다.

날개가 있으면 추락 판정과 활공 밸런스라는 문제가 새로 생긴다. 무엇보다 날 수 있으면 발판을 캐도 무섭지 않다. 날개가 없어야 발판을 캐는 대가(추락)가 분명해진다. 날개는 나중에 리썰 컴퍼니식 구매 아이템 후보로만 남겨 뒀다.

섬 사이는 구름을 쏴서 건넌다

날개를 빼고 나니 섬 사이를 어떻게 건널지가 남았다. 비슷한 게임들의 이동을 축 세 개로 비교해 봤다.

축 한쪽 끝 다른 쪽 끝
길을 누가 만드나 고정 다리, 즉시 텔레포트 플레이어가 캔 자원 (Unrailed는 캔 자원으로 선로를 깐다)
실패가 어디까지 번지나 나만 강제로 전원 (Chained Together)
묶임이 강제인가 선택 강제

양 끝은 둘 다 문제가 있었다.

  • 간섭 없는 이동(고정 다리, 즉시 텔레포트, 마리오 원더의 온라인 플레이)은 이동하는 동안 사건이 0이다. 초안의 나무 다리가 그렇다.
  • 강제로 묶는 이동(Chained Together)은 “동료를 위험하게 할지 말지”를 내가 고르는 선택을 없앤다.
  • 혼자 할 때 재밌는 이동(저스트 코즈 3, 야생의 숨결)을 멀티에 그대로 넣으면 다들 흩어진다. 가져올 건 이동 기술이 아니라 이동이 남에게 영향을 주는 지점이다.

그래서 내가 낸 제안은 시작 지점 대포 + 청소기로 구름을 쏴서 반동 점프다.

섬 간 이동 제안 이미지. 한 천사가 구름을 뿜는 대포 옆에 서 있고, 다른 천사가 구름 궤적을 그리며 건너편 섬의 주문대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 캔 구름이 납품용이자 이동 연료가 된다. 발판 = 연료다.
  • 구름이 모자라면 점프를 못 하니, 이를 악물고 자기 섬을 또 캐야 한다. 이 모순이 노리는 재미다.
  • 대포는 출발 장치이자, 연료가 바닥났을 때 막힘을 푸는 안전망이다.

이동이 새 시스템이 아니라 핵심 동사(발판 캐기)를 다시 쓰는 거라 테스트할 변인도 하나만 늘어난다. 레퍼런스 원리도 하나씩만 들어왔다. Unrailed의 “캔 자원이 길”, 로켓 점프의 “반동으로 이동”, 스플래툰의 “탄약이 곧 이동 수단”이다. 일부러 떨어져서 대포를 타는 꼼수를 막을 비용(대기 시간이나 연료 초기화)은 아직 팀원과 검토 중이다.

이 규칙에서는 이런 장면도 나온다. 누가 중간 섬을 다 캐 버려서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다. 막아야 할 리스크처럼 보이지만, 바닥만 대포라는 안전망으로 받쳐 두면 그 장면 자체가 의도한 긴장이 된다.

소감

여러 게임을 조사하면서 왜 그렇게 설계했고 뭘 의도했는지 팀원과 토론하고, AI 데스크 리서치로 여러 아이디어를 종합해 가며 새 아이디어를 짜내는 게 힘들었지만 나름 재밌었던 것 같다.